원래 갑.을(甲乙)은 우열 또는 서열의 의미가 아니다. 우주 대자연의 흐름을 나타내는 10천간(天干) 12지지(地支)라는 동양사상에서 나오는 용어일 뿐이다.

갑을은 모두 오행상 성질은 나무(木), 계절은 봄, 방위는 동쪽, 색깔은 청색, 맛은 신맛, 감정은 성냄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갑이 크고 강하고 능동적인데 비해 을은 작고 약하고 피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갑을이 우열 또는 서열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이다. 일례로 30명 안팎의 조선시대 문무과 최종 합격자 중 1-3위 최상위를 갑과, 이어 차례로 을과, 병과 순으로 분류했다. 근대화된 이후에는 각종 계약서를 작성할 때 대체로 권한이 강한 쪽을 갑, 의무가 강한 쪽을 을로 표기해왔다.

요즘 갑을을 둘러싼 논쟁이 확산되는 추세이다. 공교롭게도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동시에 터져 나와 불을 활활 붙인 형국이다. 대기업 간부가 항공기내에서 여승무원에게 라면 잘못 끓인다고 행패를 부린 일, 큰 우유회사가 일선 대리점에게 횡포를 일삼은 일,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 방미 수행 중에 인턴 여직원에게 성추행을 자행한 일 등등이다.

논쟁의 불길은 정치권으로 재빠르게 옮겨 갔다. 여야는 각자 을을 자처하더니 급기야 제1 야당은 아예 ‘을을 위한 정당’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안철수 의원까지 자신을 병(丙)이라고 규정하며 논쟁에 뛰어들었다.

갑도 을도 아닌 제 3지대 가장 소외된 세력이 병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러다가 시대적 화두가 경제민주화인지 아니면 갑을공방인지 헷갈릴 지경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논쟁은 건설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갑을을 무조건 적대관계로 몰아가 “1프로 대 99프로”니 선동적인 주장을 강변해서는 참으로 곤란하다. 극우와 극좌가 얼핏 정반대인 듯해도 유사점이 많은 이유가 바로 둘 다 파괴적이고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비록 갑을은 현실적인 힘에 있어서는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고 상생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의당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구조와 관행은 꼭 개선해야 한다. 정치권이야말로 그런 공정한 풍토와 환경을 만드는데 앞장서야 마땅하다.

세상에는 영원한 갑도 100% 갑도 존재하지 않는다. ‘슈퍼 갑’처럼 보이는 국회의원도 선거 때면 의무 다할 테니 표를 달라고 국민에게 읍소하는 을의 처지이다. 모쪼록 갑을이 함께 어울려 공존공영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모든 지혜와 정성을 모으면 좋겠다.


안상정 / 논설위원

안상정 / 논설위원